SNUAC NEWS

지난 2월 11일, 이른 아침 자카르타를 떠나 반뜬주 르박군(kabupaten Lebak,Provinsi Banten)의 군청소재지 랑카스 비퉁으로 향했다. 9명의 우리 일행은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있는 한-인니문화연구원(원장: 사공경)에서 기획한 315차 문화탐방을 가는 길이었다. 주요 일정은 ‘물따뚤리 박물관(Museum Multatuli)’ 개소식 참석 및 소설 <막스 하벨라르 Max Havelaar>에 등장하는 장소와 관련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박물관 개소식에 참석한 지역주민들. 뒤의 동상이 물따뚤리란 필명으로 더 유명한 데케르 작가이다.

<막스 하벨라르>는 네덜란드 작가 에두아르드 도우스 데케르(Eduard Douwes Dekker)가 1860년 발간한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다. 박물관의 이름이 된 ‘물따뚤리’는 데케르의 필명이다. 언뜻 인도네시아어처럼 들리지만, 물따뚤리는 라틴어로 “너무 많은 고통”이란 뜻이다. 소설 속의 막스 하벨라르는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관료였으나 폭력적 식민정책과 본국인-식민지인들 사이의 불평등에 회의하며 때때로 식민지인들의 편에 섰던 의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혹자는 막스 하벨라르를 ‘식민지의 로빈후드’로 부르기도 했다. 소설 속 인물 막스 하벨라르는 여러 측면에서 작가 자신과 삶의 궤적이 겹친다. 다시 말해, 소설 속의 막스 하벨라르와 소설의 저자(필명)인 물따뚤리와 19세기 중반 르박 군의 식민관료였던 데케르는 같은 사람의 여러 자아라 할 수 있겠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00년대 중반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파산하고 네덜란드 정부에 의한 식민지 직접통치가 시작되었던 시기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식민지 경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하고, 농민들에게는 현금화할 수 있는 커피와 설탕 재배면적을 강제로 할당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식민 대리인(주로 현지인 지방관료)들을 내세워 세금과 현물을 징수하게 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식민지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폭력적 방식이 자주 동원되었다. 자바와 수마트라섬에서는 현지인들의 식량인 쌀 대신 상품작물 재배를 강요당한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이다 굶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가혹한 착취에 시달려 농촌을 탈출하는 농민들도 다수 발생했는데, 도중에 붙잡혀 악어에게 던져지는 일도 많았다.

여러 언어로 번역된 소설 <막스 하벨라르>
<막스 하벨라르>의 영향을 받은 독립운동가와 작가들. 왼쪽부터 까르티니, 수카르노, 수디르만(인도네시아 독립운동가), 호세리잘(필리핀 독립영웅), 쁘라무디야(인도네시아 작가)

소설은 당시 반뜬주 르박 지역에서 자바인들에게 행해진 착취를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본국 정부와 유럽 시민들에게 스스로 누리는 풍요가 식민지 아시아인들의 고통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했다. 이 소설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의 식민정책은 현지인에게 교육과 문화를 제공하겠다는 ‘윤리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러한 교육개혁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가 싹틀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를 대표했던 문인 쁘라무디야(Pramoedya Ananta Toer)가 이 소설을 일컬어 ‘식민주의를 끝장낸 책’이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뜬주의 남쪽에 위치한 르박군은 두 개의 하천, 찌버랑(Ciberang)과 찌우중(Ciujung)이 합류하며 만들어 놓은 분지 지역으로 산지와 평야가 맞닿아있어 쌀농사 뿐 아니라 커피, 사탕수수, 야자 재배에도 적합한 곳이다. 르박군은 고속도로 중심의 현대적 육상교통(예컨대, 자카르타-므락 고속도로)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다. 하지만 자카르타에서 반뜬주(서쪽)를 향해 식민시대 건설된 철도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정서 방향이 아니라 르박이 있는 남서쪽을 향해 크게 휘어졌다가 다시 북서향에서 자바섬 서쪽의 므락에 이른다. 추측건대 르박군 그리고 군의 중심지였던 랑까스비뚱이 과거에는 농업의 중심지이자 상품작물 재배지로 상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자카르타-반뜬주 철도 교통망. 랑카스비뚱이 소설 <막스 하벨라르>의 주무대이다.

오늘날 인구 15만 명에 불과한 농업기반의 작은 군 르박은 현재 물따뚤리를 콘텐츠로 한 다양한 문화자원을 개발함으로써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고 지역의 장소 정체성을 만들어가겠다는 제법 야무진 구상을 실현 중이다. 2018년 2월 11일에 개장한 물따뚤리 박물관은 신임 우바이딜라(Mr. Ubaidilah) 관장의 노력과 르박군(군수 Hj. ITI Octavia Jayabaya)의 든든한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지역의 중등 교원이었던 우바이딜라 관장은 대학 시절 <막스 하벨라르> 소설을 접한 후 관련 독서모임을 만들고, 소설 관련 국내외 자료를 모아 온 사람이었다. 15년 이상 지속한 그의 개인적 노력은 군청이 일종의 장소마케팅(place marketing)을 위해 물따뚤리에 주목하면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사진 설명> 물따뚤리로(Jalan Multatuli).르박군은 물따뚤리박물관 개소를 기념해 박물관 앞 도로명을 ‘물따뚤리로’로 개칭했다.

군청 앞 광장(Alun-Alun)의 동쪽에 새로 건축된 박물관은 소설에 관한 내용과 당시 식민세력에 대항한 농민과 민족주의자들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는 제법 큰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밖에 데케르가 직접 거주했던 식민 관료를 위한 관사(아쉽게도 현재느 절반 이상이 잘려나갔고 보전상태도 좋지 않다), 그의 필명을 딴 거리(Jalan Multatuli), 소설 속 악역의 실제 모델이었을 현지인 군수의 무덤 등이 가까운 거리에 모두 자리 잡고 있다.

이 모든 관광자원은 자카르타에서 2시간 반 남짓 거리에 조성되어 있다. 이곳을 방문하게 되면 식민 시대 인도네시아인들이 겪은 고통과 이를 벗어나기 위한 농민과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의 역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또한 그 시대에 지배자의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식민 지배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더 나아가 착취당하던 인도네시아인들의 편에 서고자 했던 ‘물따뚤리’의 이야기는 제법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인도네시아를 찾는 한국 방문객들이 반뜬주의 물따뚤리 박물관 여행을 통해 한국 사람과 인도네시아 사람 간의 관계맺음에 대해서도 한 번쯤 성찰해 보는 기회를 가져볼 것을 권해 본다.

<남은 이야기>

하나. 문화탐방을 기획한 한-인니문화연구원은 자카르타 교민들의 자생 조직으로, 문화를 통해 인도네시아와 한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비영리단체이다. 문화탐방, 열린강좌, 인터넷 공모전, 인니어 강좌 등을 통해 교민들에게 인도네시아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왔다. 인도네시아 문화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은 한-인니문화연구원(www.ikcs.kr)에 연락하면 현지의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물따뚤리 박물관을 있게 한 소설 <막스 하벨라르>는 소설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정무역(fair trade movement)의 대표 브랜드 중 하나이다. 멕시코의 가난한 농민을 지원하던 네덜란드인 프란스 판 데어 호프 신부는 농민들과 함께 1988년 ‘막스 하벨라르’라는 이름의 무역회사를 만들고, 농민들이 재배한 커피에 동명의 상표를 붙여 유럽 시장에 팔았다. 막스 하벨라르는 공정무역 운동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한 최초의 사례이다.

. 1860년 발간된 물따뚤리의 소설 <Max Havelaar>는 현재까지 3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영어판 1868년, 인도네시아어판 1972년). 이 소설은 현재 인도네시아 교민 배동선 작가(인도네시아 문협 및 인문창작클럽)와 양승윤 교수(한국외대 명예교수)에 의해 번역 중이다. 유럽 식민주의에 경종을 울린 이 고전을 올 상반기에는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

 

글 | 엄은희(동남아시아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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