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연구소에서는 지난 1월 16일 문화연구 분야의 석학 로렌스 그로스버그 교수를 초청하여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우리시대 역사, 정치, 지식의 도전 (The challenge of the contemporary: history, politics, knowledge)>이란 제목으로 진행된 이번 강연은 지식인의 역할을 주요 화두로 삼아 우리시대가 당면한 교착상황을 문화의 문제로 이해하고, 일종의 ‘감정의 구조’로서의 문화, 정동(affect)의 문제를 제기하는 자리였다. 이번 콜로키움은 한국사회의 정동의 문제와 마음의 사회학, 그리고 미국 정치제도의 전문가를 토론자로 초청하여 진행되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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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그로스버그 교수(Lawrence Grossberg)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모리스 데이비스(Morris Davis) 석좌교수로서, 문화연구 분야에서는 국내 연구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세계적인 석학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화연구, 문화이론, 근현대 철학, 현대 정치문화, 근대성(modernities), (정치)경제학 등이다. 최근에는 대안적 근대성(other Modernities)의 문제를 비롯하여 당대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분투, 미국 청년들의 삶의 상태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의 주장은 ‘대중은 바보가 아니다. 문화는 해방의 도구다. 지금은 탈현대의 시대다. 객관적인 진리가 아닌 복수의 진리, 확실성이 아닌 모호함, 통일이 아닌 개성, 신념이 아닌 의혹이 필요하다. 문화연구의 대상은 계급만이 아니라 인종, 젠더, 지역 등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문화연구자는 이러한 모순을 개선할 수 있는 문화 생산을 지원하는 것이다’로 정리된다.”(임영호 교수,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이번 강연의 화두는 오늘날 미국사회 지식인의 역할이었다. 그로스버그 교수는 현대 사회에서 일련의 정치적 갈등, 제도적 압력, 이론적 교착상태 등의 복합적 결과로 지식의 지위가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진단하며, 현재 맥락의 복잡성을 파악할 수 있는 또 다른 지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우리시대가 당면한 현실 맥락을 다음과 같이 상호모순적인 여러 상황의 복합적 효과로 분석했다. (1) 현재와 미래에 대해 수동적이고 냉소적인 사람들, (2) ‘시장근본주의(market fundamentalism)’라고도 할 수 있는 현상유지에 만족하는 사람들, (3)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 실천(political activism)과 투쟁의 감각(a sense of struggle)은 강하지만, (4) 그 실천들이 효과적인 사회운동으로 구축되기에는 놀랄 만큼 무기력한 상황. 그로스버그 교수는 이 교착된 상황을 문화의 문제로 이해하는데, 특히 일종의 “감정의 구조”로서의 문화, 정동(affect)의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정동의 문제가 어떻게 일상생활과 사회제도적 역사 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의미와 문제제기의 지형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루었다. (※ 자세한 내용은 하단 강연 요약 참조)

<우리시대 역사, 정치, 지식의 도전 The challenge of the contemporary: history, politics, knowledge>

연사 : 로렌스 그로스버그 교수(Lawrence Grossberg)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석좌교수)
사회 : 홍석경 교수(서울대 언론정보학과)
토론 : 이옥연 교소(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김홍중 교수(서울대 사회학과), 김예란 교수(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일시: 2015년 1월 16일(금) 15:00~17:00

[강연 요약]

우리시대 역사, 정치, 지식의 도전 by Lawrence Grossberg

난 미국의 암울한 정치적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국이 지옥으로 향하고 있으며, 전 세계를 같이 끌고 가려 한다는 것이다.

먼저 미국에서 일어나는 5가지 현상에 대해 나에게 확실한 사실들을 나누고 싶다. 나는 단순히 발표를 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하고자 한다. 이 대화는 미국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좌익 지식인의 기여와 책임에 대한 것이다. 지식의 위기부터 시작하겠다. 지식의 위기는 특유의 감정 구조를 재생산하는데 진보는 이를 돕지는 못하고 오히려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미국의 미래에 대하여 이 비관적이거나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인들이 현상(status quo)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Where’s the outrage? 왜 사람들은 빈부격차의 악화와 인종차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분개하지 않은가? 미국인들에게는 세상의 종말이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더 상상하기 쉽다.

셋째,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시위와 사회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말 그대로 몇십만의 사회 운동 단체들이 현재 움직이고 있다.

넷째, 미국은 최근 백 년 사이에 이념적으로 최고로 분열되어 있다.

다섯째, 진보는 매우 무능하다는 것. 오늘의 수많은 운동들은 전체적으로 비효과적이다.

즉, 우리에겐 매우 큰 문제가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진보운동이 이처럼 사회의 방향에 대해 영향력이 없었던 적이 없다. 진보는 정치적으로 잘못된 방정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지식의 위기>

기적과 천사를 믿는 미국인이 진화론을 믿는 미국인보다 많다. 지구 온난화를 안 믿는 미국인이 다수가 됐다. 오바마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라고 믿는 미국인이 40%를 넘는다. 정말 울지 않으려고 웃을 수밖에 없는 이러한 예는 많다. 공교육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며, 과학 연구와 인문 예술에 대한 지원마저 공격당하고 있다.

미국은 여느 근대국가 못지 않게 늘 교육의 가치를 중시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의 가치조차 이제 흔들리고 있는 것을 우리 고향에서도 흔치 않게 경험했다. 리차드 닉슨은 인종차별을 이용하여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를 공화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닉슨은 Silent Majority라는 컨셉도 발생시켰는데, 교육받은 세속적인 엘리트를 제외한 절대다수 미국인이라는 애매한 개념을 만들어 경험과 교육 간의 배틀을 부추겼다. 그리고는 교육을 배척하였다. 경험은 대부분의 일반 서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교육받은 도시인들은 오만하다는 생각을 심어주어 미국의 정신에 정착시켰다. 이를 몇십 년 동안 대중 매체가 강화하였다.

상충하는 지식에 대하여도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항상 정반대의 정보를 연이어 얻기도 한다. 한 시에는 커피가 몸에 좋다는 발표가, 그 다음 날에는 나쁘다는 발표가 나오는 세상이다. 이러한 것들은 혼돈과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입맛에 따라 미국의 대중은 정보를 취사선택하여 무지를 끌어안는다. 어떤 책에서는 우익이 의도적으로 막무가내식으로 정보를 발산하여 이목을 분산시키고 있다고도 한다.

문제의 일부는 우리 학자들에게 있다. Publish에 대한 압력과 강박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의견을 철저한 고증없이 발표하고, 스타가 되는 것을 대학과 언론이 권장하고 있다. 대학들은 젊은 학자들을 빠르게 fast track에 앉히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어떻게든 획기적인 연구 발표를 해서 유명해지고 대학에 연구 지원금이 더 들어오는 사이클을 지속시킨다. 이에 대한 결과는 학계의 수많은 스캔들로 드러난다. 일례로 미국의 생명공학에서 발표하는 70%의 자료는 거짓이라고 한다! 데이터 조작, 과장, 왜곡 등이 판을 치고 있다. 이들이 만드는 의약품이 현재 우리의 병원에서 처방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이러니 일부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도, 그래서 믿기를 거부하는 현상이 있는 것이다.

소시적에는 한 분야에 저널이 한 개 정도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문화연구같은 협소한 분야에도 엄청나게 많은 저널이 있다. 책장을 가득 메우는 저널은 마치 케이블TV의 채널처럼 수백 개에 이르고 케이블 채널과 같이 대부분 쓰레기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논문 publish의 압박이 요즘은 젊은 학자뿐만 아니라 대학원생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이러한 압력은 매우 질 낮은 학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떤 책은 모두가 이미 아는 사실을 학문인양 떠들어대며 홍보 효과와 하버드라는 이름에 힘입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세상은 우리 진보적 지식인들이 상대주의자라고 믿는다. 우익 매체는 지식이 항상 정치적이라고 하며, 온난화나 여성운동 지식을 좌파 정치의 어젠다로 치부해버린다. 거기에 대해 우리는 마땅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사회적으로 축조된 것이 많다. 하지만 현실 자체에 대해서만 집착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세상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사용해서 인간의 가능성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Affect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는데, affect는 단지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서, 신념에 대한 intensity와 우리가 세상에 대해 인지하고 해석하는데 구조적인 틀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affect의 구조는 우리의 모든 태도와 사상을 뒤덮고 있다.

Hyperinflation 뭐든지 best여야 한다. 그냥 ok일 순 없다. 영화도 레스토랑도 책도 항상 최고임을 자처한다. 투자의 질보다 투자의 양과 의지가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노력과 투자를 뒤엎을만한 적은 절대악이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익 미디어에게 오바마는 사탄 그 자체가 된 것이다.

Fanaticism – 좌파도 fanaticism의 논리에 휘말렸다. 자본주의는 거대하고 막강한 악마이고 우리는 그에 대항하여 싸울 수 없다. 이길 수 없는 적이다. 진보에게 이처럼 극단적인 패배주의가 만연하다. 수평적 사회 운동(순수 대중 운동)은 더는 수직적 사회 운동(조직화된 운동)과 협조하지 않는다. 그들도 권력구조와 타협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수평적 운동만이 살길이고 진정한 사회운동이라고 생각하는 fanaticism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신의 목소리와 권리가 지켜져야 한다는 절대적 소수가 갈수록 분화되고 다양해져, 캠퍼스 내 trigger 정책(어떠한 소수의 그룹이라도 심기가 불편할 것 같으면 미리 경고하고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권리에 대한 절대적, fanatical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모습이다.

 

강연 요약 | 송신의 (출판 조교/언론정보학과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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