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5일 개최된 박사학위 논문상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발표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요약 정리하였다.

 

“위령, 애도가 지금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다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이영진(전남대 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

 

젊은 연구자들은 학위 논문들에 대해 후속 작업을 하지 못한 채 다른 연구로 넘어가는 경우 많다. 이 상을 계기로 다시 출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이 저로서는 채찍을 받은 느낌이 있다. 책을 내기 위해 더 분발하고 노력해야겠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전후’란 단어를 들었을 때 느끼는 위화감에서 출발했다. 특히 8월이라는 시즌이 되었을 때,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일상적인 일본사회와 다른 독특한 느낌이 들었다. 8월 6일의 히로시마를 시작으로 야스꾸니 신사 참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다양한 특집 다큐 등 일본에서 8월 한달은 ‘전쟁’에 대해 끊임없이 무엇인가 이야기 하는 시기이다. 왜 일본은 아직까지 전쟁을 이야기하는가, 이 위화감이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어떤 이야기로 포커스를 맞출까 고민하다가 역시 전후 사회에서 중요한 부분은 ‘죽음’의 문제를 살아남은 사람들이 수습할 것이냐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특히 일본은 전쟁으로 3백 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죽은 나라다. 이러한 죽음 이후 그 사회는 어떤 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이런 부분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위령’이란 단어로 , ‘영을 위로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이해해왔다. 일본사회에서 하나의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그럼 야스꾸니 신사와 같은 방식도 있겠지만, 특히 지역사회라던가 일반 가족의 수준에서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보고 싶었다.

죽음이라는 문제에서도 일본사회에서 15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아-태 전쟁에서의 죽음 중 가장 터부시 되는 죽음, 가장 순수하고 무모한 죽음인 ‘특공’이란 이들의 죽음을 지역사회는 어떤 식으로 기억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게 필드로 ‘가고시마’를 선택한 이유다.

가고시마 지역의 지도 중 인상적인 것은 바로 ‘특공 기지’의 지도다. 이 지역에는 항공 특공으로만 19개의 기지가 있었다. 전라남도 크기의 현에 19개의 비행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지가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만들어냈을까 하는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지도는 다름 아닌 ‘공습’의 지도이다. 1945년 3월부터 일본에서는 대도시 공습이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가고시마는 시골을 포함하여 80% 지역이 공습을 당한다. 바로 비행장을 파괴하기 위한 공습이었다. 그런데 왜 공습에 대한 기억은 잊혀지고, 1990년대 이후 특공의 기억만 더 환기되었는가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전체 논문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장은 위령이란 개념에 대한 것이다. 사실 하나의 용어들, 개념들을 만드는 것 자체가 담론 정치의 장이다. 즉 죽은 이를 전사자로 부를 것인가, 혹은 전몰자로 부를 것인가, 그리고 이에 따라 이들을 ‘위령’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담론의 정치학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두 번째 장에서는 특히 전시기, 전후가 아닌 전쟁시기의 전사자의 위령, 기념이라는 문제들에 대해 고찰했다. 위령이라는 애도의 방식은 전후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전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다. 위령은 1945년 8월이란 시점에서 잠깐 멈추고 금지되었다가 1950년대 중후반부터 재가동된다. 전전의 위령과 전후의 위령 양상이 어떻게 바뀌는가, 어떤 부분이 지속되는가의 문제들을 고찰한다는 측면에서 3장에서는 전시기 위령에 대해 조사, 기술하였다.

4장에서 했던 작업은 특히 가고시마의 여러 특공기지가 있었던 마을에서 특공대에 대한 위령이 전개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를 참여관찰의 방법으로 자료를 모아가며 시작했다. 특공사라고 하는 부분은 일본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인기 있는 이야기면서 동시에 터부시 된다. 그들의 죽음을 이야기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성스로운 죽음, 또 한쪽에선 개죽음, 무모한 희생이라고 말한다. 여기엔 양가적인 측면 있다. 이 죽음이라고 하는 부분에는 일본 내의 진보적 인사들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이것이 어떤 식으로 소환되고 기억되는지 참여관찰 자료를 모아가며 중점적으로 기술했다.

‘위령’은 이미 기억의 영역에서 기념의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1960~70년 지나면서 전쟁 체험이 풍화된 것이다. 이 중 기념의 영역을 주도하는 것은 기념관이다. 가고시마에서도 그 조그마한 마을에 특공에 대한, 육군의 특공기지가 있던 마을이나 해군의 특공기지에 기념관이 있다. 이런 기념관에는 한해 60~70만 명의 사람들이 온다. 가고시마 같으면 도쿄에서 비행기로 2시간 반 거리인데, 이곳에 매년 60만 이상이 와서 특공 기념관을 본다. 이 기념관을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기념의 논리를 만들어내는가에 주목하고 싶었다.

지역공동체가 주도한 것도 있지만, 일반인, 특히 개인적 기억이 있는 사람이 만드는 사설 기념관도 있다. 공식적인 곳은 고귀한 희생을 강조하고, 사설 기념관에서는 좀 더 개인적인 기억을 이용하면서, 한쪽에서는 개인의 죽음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춘다. 양자가 모두 죽음의 비극성을 강조하면서 결국 특공대원의 죽음을 미화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런 부분이 ‘희생’을 강조하는 전후 일본에서 독특한 희생 담론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동시에 이런 기념관을 만들게 된 동력에는 지역 사회에서의 마을 만들기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농촌 마을에서 특공이라는 것은 ‘노스텔지어’를 환기시키는 상품으로서 마을만들기 사업에 활용되는 것이다. 이는 지역 정치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부분이다.

현장에서 새롭게 발견한 문제도 있었다. 내가 가고시마에 갔을 때, 가고시마에 특공 연구를 하러 왔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다양했다. 이 과정에서 가고시마라고 하는 곳이, 기본적으로 ‘조선’이라고 하는, 심상 지리 혹은 실체인 조선 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사 과정에서 조선인 특공대원이나 조선인 강제연행의 문제들을 발견한 것이다. 필드를 안 했으면 발견 못 했을 문제들이다. 인류학적 작업은 필드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걸 이 연구를 통해 확인했다.

특히 19개의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4년동안 그 일을 누가 했는가의 문제가 이와 관련되어 있다. 1960~70년대 자료를 보면, 가고시마의 전쟁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특공에 대한 기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들이 비행장을 만들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환기된다. 동시에 그 기억 기술의 과정에 등장하는 ‘타자’들이 조선인, 강제 연행된 중국인 포로였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1980~90년대로 가면서 점점 잊혀졌다. 왜 이런 기억이 잊혀지는가. 이것이 잊혀지면서 일본인들의 전쟁 체험으로 기억이 바뀌면서 특공에 대한 기억으로 변이가 일어나는가. 기억의 정치. 강제연행이라고 하는 필드에서 만난 체험을 계기로 새롭게 발견했다.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운 논문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죽음이라는 것, 죽은 자들, 죽음이라는 것을 한 사회가 어떤 식으로 맞이하고, 그걸 기억하고 수습할 것인가의 문제가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모든 사회가 보편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 한 방식으로서의 행위가 ‘애도’라면, 애도는 무엇이어야 하며, 전후 일본사회에서 애도는 어떤 특징과 양상을 나타내고 어떤 방향으로 치닫고 말았는가. 본질적인 애도의 기능인 죽은 자와의 만남, 죽은 자의 이야기 듣기는 풍화되고 다른 기억으로 왜 변화하는가 라는 질문을 결론에서 하고 싶었다.

연구를 마치면서 깨달은 부분이 두 가지 있다.  먼저, 전후 일본사회와 죽음의 문제가 국민국가와 관계 맺는 방식에 있어 매우 중요한 논의라는 점이다. ‘국가를 위해 죽는다’라는 국민국가에서 공유되는 관습적 사유에 대해 전후 일본은 비켜설 수 있었다. 어찌되었건 (잘못된) 전쟁 때문에 3백 만명이 죽었다는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국가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의문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전후 일본이 전 세계에 던질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었다. 그런데 이 체험이 희석되고 바뀌어간다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죽음’의 성스러움의 문제다. 어찌 되었건 죽음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전제가 있었다. 죽은 자에 대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전제. 그런데 최근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죽음이란 과연 성스러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자에 대해서, 유족들에 대해서 사회가 반응하는 것이 과연 보편적인가. 이런 부분이 죽음에 대한 ‘성스러움’이란 개념이 바뀌는 것은 아닌가. 마찬가지로 단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의미해진 상황은 죽음의 무의미성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 이런 사회에서 애도는 무엇인지 이 부분에 대해 다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1930년대 식민국가의 통계는 농정을 안정시키고 지식인을 전향시키는 힘이었다”

김인수(연세대 국학연구원 박사후연구원)

 

먼저, 논문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논문은 2, 3, 4장을 역순으로 썼는데, 그 과정을 말씀드리겠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바로 1930년대론, 그리고 이 시기의 ‘안정화’에 대한 것이었다. 1920년대까지는 소작쟁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1930년대 넘어와서는 법적 다툼의 문제,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다투는 방식으로 소작쟁의가 변화한다. 이와 관련해서 1930년대 조선사회성격논쟁이 일종의 통계 논쟁이 되어 있는게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분석하기로 마음먹었다. 특히 식민지 농정에서 ‘인식체계’라는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해석하게 되었다.

특히 이를 지식생산양식의 분석으로 진행하고자 했다. 지식생산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전제들이 필요하다. 이론과 자료와 방법론이 어떻게 나오고 있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지식 생산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고, 또 사후에 어떻게 구조화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지식생산의 동아시아성을 충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일제하 조선에서 농정의 인식과 관련하여 식민지 사회의 지식장에 미친 영향을 당시의 인식체계를 구축한 세 가지 요인인 법, 조사, 사회과학에 대한 검토로 수행한 것이다. 법은 개념을, 조사는 범주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며, 사회과학은 이론과 방법론을 제공한다. 이 논문에서는 그 의미를 각각 추적하고자 했다.

논문의 시작은 5, 6년전 한 연구모임에서 전향한 사회주의자 인정식이란 사람에 대한 글을 검토하는 기회에서였다. 이 자료를 계속 읽다 보니, 그 안에 1930년대의 동아시아론이 등장하고 있었다. 사실 인정식은 그동안 ‘친일’이란 문제로서만 다루어졌기 때문에 그동안 이 책은 잘 보지 않던 책이다. 1930년대 일본의 동아시아론의 맥락 안에서 조선인의 동아시아론은 결국 친일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정식의 전향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지적 전환을 어떻게 추적할 수 있을까?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지식생산에 필요한 소재나 이론, 자료, 방법이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의 변화를 추적해서 어떤 국면이 전향의 결정적인 계기인지 아닌지를 테스트해보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랬더니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가령, 지표에서도 동아시아, 동양농업에서 경작 규모의 영세성이나 역사유물론의 시선이 1938년의 전향 이후로는 토지생산성,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이동한다. 이론 안에서의 상충이 있는데, 기존에 부정한 것을 다시 채용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회과학이 기준으로 삼는 지표와의 방식, 비교의 대상으로 선정하는 상대가 전향 전후로 현격하게 바뀌는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사회성격논쟁은 1980년대에 사회구성체논쟁의 전사(前史) 형태로 이론적으로 소비했던 경험이 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서 일본에 미국을 넣고 조선에 한국을 넣으면 상당히 유기적으로 잘 들어맞았던 것이다. 결정적 차이는 1930년대 논쟁은 통계논쟁이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사구체논쟁은 이론적 정합성의 문제였지 통계의 문제가 아니었다. 1920년대 중국에서도 사회성질논쟁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통계가 없었다. 일본에서 자본주의논쟁은 통계논쟁이었다.

사실상 통계는 장악력의 상징이다. 사회를 얼마나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통계는 식민국가의 조선사회에 대한 통치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당시 논자 중 박문규라는 사람을 예로 들면, 경성제대 2기생으로 스승이 시가타 히로시였다. 일본에서 1910년대 사회정책학회 활동을 많이 한 사람인데, 통계를 추출해서 개혁적, 정책적 논의를 해야 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에 처음 부임해서 한 일이 바로 통계자료를 수집해서 묶어내고 해제를 다는 작업이었다. 그는 조선은 비지성과 비합리가 난무하는 공간이어서 경성제대, 경제학교실에서 통계를 많이 만들어내고 수집해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압해 들어가야 한다는 기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박문규가 이 조수 일을 했다. 1933년에 논문을 냈는데, 일종의 조선인이 보여준 아카데미즘의 수준을 보여주는 논문이라는 평가를 받는 글이다. 조선총독부에서 수집한 통계 수치 24개를 내세우며 조선사회의 반봉건성을 설명하는 논문이다.

통계를 지식사적으로 놓고 보면, 통계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때가 아니라 지식과 의견이 난무할 때 내는 것이다. 통계는 결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결정하는 방법이다. 또한 아카데미즘을 구축할 때 유용한 자원이다.

박문규는 학문적 훈련이 되어 있었던 반면, 인정식은 공산당에서 선전과 조직 업무를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다. 1920년대 말에 검거되어 감옥에서 4년 반을 살고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자마자 통계 논쟁을 벌인다. 감옥에 있으면서 마냥 쉰게 아니라 그 안에서 각고의 노력을 한 것이 보인다. 그런데 아카데미즘은 제도, 고유한 문법, 장 안의 논리가 있다. 입회의 자격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게 그런 역할을 한다. 통계라는 독특한 지식생산수단이 만들어낸 효과가 장을 제어하게 되고, 그래서 그 속으로 걸어들어간 지식인은 ‘탈혁명화’, 전문가화되는 것이다.

또 참고자료를 추적하다 보니, 조선사회성격논쟁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자료가 <조선의 소작관행>이라는 1932년에 나온 보고서다. 이 자료는 지금도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에서 기초자료로 쓰인다. 2천 페이지가 넘는 자료인데, 간략히 설명하면 그 이전까지 하지 못한 면 단위에서 소작기간, 소작료, 소출 등의 자료를 수집해서 군으로 올려서 평균치, 통계치를 내는 자료이다.

총독부에서 했던 소작제도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찾다 보니 35가지 종류가 나왔다. 그 내용을 분석하니까 면 단위에서 계수화, 지수화 되다 보니 옆마을 소작료 가격과 전국 평균치 같은 것이 드러난다. 소작료가 적정한지, 올릴지, 깎을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것이다. 예전에는 얼마가 적정한지 파악하지 못하여 마음대로 올리거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통계 자료가 공개된 이후에는 조정이 상당히 이루어졌다. 어떤 수준이 적합한지의 판정이 가능해지는, 농정 문법의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조선의 소작관행>이라는 보고서는 식민국가의 사회 장악력을 보여주면서도, 사회관계를 숫자로 환산, 표상해서 사회갈등을 조정 타협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1932년 <조선의 소작관행>에서 질문 항목과 조사 방식이 1921년 일본에서 이루어진 소작관행 조사를 거의 그대로 본 땄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1885년, 1912년, 1921년, 1936년에 4회에 걸쳐 대대적으로 소작관행 조사를 수행했다. 특히 1921년에는 최초로 부재지주 조사를  했다. 이는 1932년 조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부재지주, 그리고 소작지관리인, 우리말로는 ‘마름’인데, 이에 대한 조사 수치가 확보된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보면 전체 지주의 35%가 부재지주로 나온다. 소작지에 있는 소작인들이 부재지주 땅을 경작하는 경우가 전체 소작인의 38%정도였다. 흥미로운 건 일단 총독부는 조사 자료를 기초로 1934년에 조선농지령을 만들어서 마름에 대한 규제를 강력하게 한다. 또 동아일보를 필두로 여러 신문에서 부재지주, 악지주, 악사음에 대한 담론들이 1933~5년에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이 담론은 그 근거를 32년 조사 결과에 두고 있다. 이와 관련된 입법도 진행되었다.

결국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 자료는 중요한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1920년대는 총독부의 착취를 욕하는 방식이었다면, 이 자료 이후로는 그 비난이 부재지주와 악지주로 상당부분 넘어간다. 이들이 사회악으로 표상되고 이들을 규제하며 갈등을 해소하는 주체로써 총독부가 조정자의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총독부가 문제의 직접적인 타겟이 되는 구도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사회장악력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런데 사후적으로 보면니 부재지주란 범주 자체가 상당히 설득력이 없는 범주였다. 당시 부재지주의 기준이 되는 땅의 크기가 들쭉날쭉했다. 이런 식으로 탈맥락화해서 기록된 것이었다. 내적 성립이 불가능한 것으로 조사하고, 타겟이 된 것이다. <조선의 소작관행>을 보통 일제시대 자료이자 객관화된 자료로 보는 경향에는 문제가 있다. 통계에서 개념이나 범주는 조사가 끝난 다음이 아닌, 조사 이전에 결정되어 기입되는 것이다. 여기에 권력이 개입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작이라는 개념 자체도 이것이 조선사회에 일반적인게 아니라 구한말 일본에서 들어온 개념이다. 더 추적하면 일본 안에서도 민법 제정과정에서 토지임대차 관행에 대한 조사를 보면,  분명하지 않았던 기준이 생각보다 일관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개념에 변화가 있었던 지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결론적으로 식민 농정에서 1930년대를 지배했던 세 가지 요소인 법, 조사, 사회과학이 만들어낸 인식체계는 식민지 사회를 ‘안정화’하고 식민지 지식인을 전향하게 하는 힘이었다고 논리를 정리했다. 지식사회학적으로는 의미 있는 논문을 썼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정치사회학적인 측면이나 개념적인 부분에서는 좀 더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더 보완해서 좋은 책이 나올 수 있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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